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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년에 9,000종 출판?"... AI가 던진 '책의 정의'와 세금 누수 논란

뉴스사색 2025. 12. 4. 11:35

- 설립 1년 만에 9천 권 쏟아낸 '루미너리북스', 제작 시간은 단 '1시간 30분' - 판매보다 '납본 보상금' 노린
기형적 구조 우려... "제도가 기술 속도 못 따라가"

 
생성형 인공지능(AI)의 파도가 출판계에도 거세게 몰아치고 있다. 최근 설립 1년여 만에 무려 9,000종이 넘는 도서를 출간한 신생 출판사 '루미너리북스(Luminary Books)'가 등장하며, AI 대량 출판 시스템이 던지는 사회적·제도적 과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1시간 30분 만에 '뚝딱'... 저자는 사람이 아닌 '시스템'

서울 동작구 소재 IT 기업 (주)지에이아이시스템이 운영하는 '루미너리북스'는 전통적인 출판사보다 기술 기업에 가깝다. 이곳의 핵심 인물인 이민혁 CTO(중앙대 교수)는 AI 소프트웨어 전문가로, 자체 개발한 AI 솔루션을 통해 출판 공정을 극단적으로 단축했다.

 

보통 기획부터 출간까지 수개월이 걸리는 단행본 제작 과정을 이들은 단 '1시간 30분' 만에 끝낸다. 인간 기획자가 키워드를 입력하면(Prompt), AI가 목차 구성, 집필, 교정, 표지 디자인까지 일괄 처리하는 방식이다. 여기서 인간은 창작자가 아닌 시스템을 관리하는 '오퍼레이터' 역할에 머문다.

주로 출간되는 책들은 '미국 주식 옵션 거래', '청소년을 위한 생명과학' 등 기존 정보를 요약·재가공한 정보성 콘텐츠가 주를 이룬다. 저자명조차 '루미너리북스 인문교양 에디팅 팀' 등으로 표기되어, 특정 개인의 사유물이 아닌 시스템의 산출물임을 드러내고 있다.

'납본 제도'의 허점... "안 팔려도 세금으로 수익 보전?"

문제는 이러한 'AI 대량 생산'이 현행 도서관법상의 '납본 제도'와 맞물려 악용될 소지가 있다는 점이다. 납본 제도는 국가 지식 자원 보존을 위해 도서관에 책을 제출하면 국가가 정당한 보상금(통상 정가)을 지급하는 제도다.

 

보고서에 따르면, 제작비가 거의 들지 않는 AI 도서를 대량으로 찍어내 납본할 경우, 시장에서 책이 팔리지 않아도 막대한 보상금을 챙길 수 있는 'B2G(기업 대 정부) 수익 모델'로 변질될 위험이 있다. 이론상 권당 1만 원의 책 9,000권을 납본만 해도 9,000만 원의 수익이 발생할 수 있어, 국민의 세금이 기계적으로 조합된 텍스트 덩어리를 구매하는 데 쓰인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실제로 국립중앙도서관은 명확한 거부 근거가 없어 납본을 수용해왔으나, 국회도서관은 AI 탐지기를 도입해 일부 거부하는 등 기관 간 대응조차 엇갈리고 있는 실정이다.

'AI 딸깍 도서'의 범람... 정보 생태계 오염 우려

독자들과 서점가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일명 'AI 딸깍 도서'로 불리는 이들 책은 검증되지 않은 정보(Hallucination)를 포함할 가능성이 높고, 온라인 서점의 신간 목록을 도배해 양질의 도서를 밀어내는 '그레샴의 법칙'을 유발하고 있다.

해외의 경우 대응이 더 빠르다. 아마존 KDP는 AI 도서의 범람을 막기 위해 하루 출판 종수를 3권으로 제한하고, AI 사용 여부 공개를 의무화했다. 반면 한국은 납본 보상금이라는 특수한 제도가 존재해, 시장 논리가 아닌 제도적 허점을 파고드는 형태라 문제가 더 심각하다는 지적이다.

"책의 정의 다시 써야"... 제도 정비 시급

전문가들은 기술을 무조건 배척하기보다 변화된 환경에 맞는 '게임의 규칙'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보고서는 대안으로 ▲ISBN 발급 단계에서의 AI 생성 여부 명기 의무화 ▲기여도가 낮은 완전 자동화 AI 도서에 대한 납본 보상금 제외 또는 축소 ▲국립중앙도서관 자료선정위원회의 품질 심의 권한 강화 등을 제시했다.

AI 시대, 텍스트의 희소성이 사라진 지금, '무엇을 남기고 보존할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와 함께 세금 누수를 막기 위한 촘촘한 정책 설계가 시급해 보인다.